자유게시판

사랑방 > 자유게시판
글 보기
게시글 내용
제목 위스타트 가족사진 감동사연
작성자 강진희 조회수 268
작성일 2016-10-20 13:45:28
1.제목: 6남매가 있기까지
2.아이이름: 박세희,세미,세윤,세인,세현,세진 핸드폰 뒷번호 :6470
3.
    우리 가족은 시어머님, 남편,1남 5녀 그리고 나 모두 9명이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6남매를 둔 우리가족은 어딜가나 사람들의 눈에 띄이는 대식구 이다. 
   겉으로 볼땐 마냥 행복해 보이기 그지 없는 우리가족이지만,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되기 까지는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6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낳고 지금까지 길러왔는지 정말 감사할 것 밖에 없다
   선교사 부부였던 우리 부부는 2003년5월에 결혼하고 2004-2014년까지 2년 터울로 아기를 낳았다.  결혼전 부터 아이들을 워낙 좋아했던, 우리 부부는 4명을 계획하고
  낳기로 약속하여 결혼하자마자 부지런히 아기를 가졌다. 지금은 모두 지난 일이 되었기에 차분히 글로 쓸 수 있지만 2004년 첫째를 출산 할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종합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나는 신생아실에서 일했었기 때문에 아기를 돌보는 것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난 그날부터 나의 생각은 모두 무너
 졌다. 왜냐하면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모유를 아기가 스스로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명은 "선천성 구개열" 이였다.병원에서 일했기 때문에 문제를 갖고 태어나는 아기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내 아기가 이런 장애를 갖고 태어나 다니,동료들에게 내색 하기 싫어서 꾹 참고 있었지만, 그때문에 나의 산후 우울증은 시작 되었다.아기에게 
 특수 젖꼭지에 모유를 담아서 한방울씩 입안에 짜 넣어줘야 하는데 나는 오로지 모유를 먹여야 겠다는 생각으로 내 몸을 돌보지 않고 모유를 짜다가 무리해서 목 디스크가 왔다.
3개월후 분만휴가가 끝나고 다시 일을 하는데 손목과 발목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아기가 18개월이 되던때 입천장 봉합 수술을 했다.  수술후 아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3일을 자지 않고 보채던 그때 정말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4개월후 나는 병원을 사직하고 2005년 11월 남편을 따라 중국 상해로 가게 되었다. 5개월된 둘째를  임신한채
수술후 회복된지도 얼마되지 않은 첫째의 고사리 같은손을 꼭 잡고,어마어마한 짐들과 함께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도착한 우리집앞 벌써 어두워진 시각'그곳의
첫인상은 내게는 너무나 낯설고 시끄러웠다. 앞뒤로 다니는 수많은 자전거들과 오토바이들,자동차들의 끝없는 경적소리 "아 여기가 중국이구나!."란 생각과 함께 나에게 스쳐 지나간
것은 "앞으로 이곳에서 어떻게 적응하지."걱정부터 앞섰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고 허름한 5층짜리건물 아파트,우리부부는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몸은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어릴적 부터 꿈꿔 오던 선교사의 삶이었기 때문에 행복했다. 그리고 2006년 6월  둘째를 낳았다. 그런데 아직 중국어가 서툰 내가 중국 현지에서 아기를 낳는 다는것은 큰 
도전이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어떻게든 산모가 아기를 빨리 낳도록 옆에서 돕는데, 그곳에서는 산모가 스스로 낳도록 기다려 주기만 했다. 언제 힘을 줘야 할지 의사소통이 안되니 너무 
답답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고통가운데 천천히 나온 아기는 너무나 예뻤다.당시에 "대장금"드라마가 유행이었는데,남편말로는 장금이 같이 키우라고 의사, 간호사가 말하더란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에서 우리를 후원해 주는 교회에서 예비 선교사라는 타이틀로 조기 유학생을 보냈다. 1기 생들을 보내더니, 한학기가 지나고 2기생, 그리고 또 다른 교회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왔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그 아이들을 데리고 작은 가정 교회를 시작 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특성상 1년에 한번씩 이사를 하다보니, 정말 그것도 힘들었다. 게다가 철없는
아이들이 어린 동생들을 때린다던지, 심지어 우리 아기들이 먹어야할 간식을 뺏어먹고, 위협하고, 놀리는 일들을 볼때면 정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아이들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008년 10월에 셋째를 출산했는데 그곳에는 난방시설이 없어서 몸조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게다가 그시기에 내가 정신적으로 충격받는
일을 당해 산후 우울증과 겹쳐서 도저히 사역을 더이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09년1월 친정엄마가 우선 첫째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한약과 침으로 몸을 조금 추스른후 8개월된 셋째를 업고 4살된 둘째의 손을 잡고 내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후 남편도 어쩔 수 없이 사역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와서도 친정신세를 지다가 이곳저곳 이사도 많이했다. 그러다 시어머님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어머님께서는 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셨다. 그러다 2016년 6월 넷째가 태어났다. 10개월동안 그래도 씩씩하게 잘 지내었는데 태어나는 과정에 문제가 터졌다. 화장실에서 아기가 나와 버렸다. 응급상황이었다. 119가 왔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소독된 가위를 달라고 하여 아기의 탯줄을 스스로 잘랐다. 그당시 너무 정신이 없어서 나는
내가 계속 출혈이 되는 상황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그런데 내 생각속에는 넷째가 아들이었길 바랬나 보다. 넷째가 딸이라는 말에 실망을 했는지 전보다 심하게 우울증이 왔다.
그후, 건강상태가 악화 되어 이젠 아기를  더 이상 갖고 싶지 않았다. 정신과에서는 "양극성 장애"로 판명이 났는데 절대로 또 임신을 하면 안된다고 당부했다. 그런데 2012년 5월 이상하게
약이 먹기 싫어서 잠시 중단을 했었는데 또 재발이 되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피검사를 해보았더니 임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게는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다. 정신과 병원에서는 당장 아기를 지우라고 했다. 하지만 산부인과에서는 아기를 낳아도 된다고 했다. 결정은 우리 부부의 몫이었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고 있던 우리 부부는 아기를 낳기로 결심하기고  아기를 낳았다.2012년 11월 ,다섯째 아들이었다. 딸 부자집에 아들이라니 경사가 났다. 일가친척 모두가 찾아와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2014년 6월에 하나님께서는 귀엽고 야무진 막내딸을 또 주셨다. 그렇게 우리 1남 5녀가 만들어졌다. 참으로 아찔하고 힘든 순간순간 들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남편과 나는 믿음으로 모든것을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항상 며느리를 이해해 주시고, 아이들을 헌신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 시어머님이 계셨기에 우리 가족이 지금껏 올 수 있던것 같다.10년 동안  아기를 낳고,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엄마인 내가 아팠기 때문에 아이들을 대할 때 한편으론 잘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고,지금껏 잘 커준 아이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앞으로도 우리가족이 더욱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도록 응원해 주세요~감사합니다.